때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끝이 보이지 않는 참호에 숨어 숨 막히는 대치를 진행하는 중입니다. 참호에서 나가 공격을 한다는 것은 정확한 정보와 승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신의 가호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영화 <1917>은 데본셔 연대 2대대의 공격 직전의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전쟁의 총성과 화약 냄새 그리고 잔혹함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주인공의 어깨너머로 체험하는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확실한 수작입니다.
감독의 결단력
모든 영화는 장르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 장르가 가진 고유한 장르성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것은 클리셰이기도 하고 다르게는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공포영화는 무서워야 하고 코미디 영화는 웃기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917>은 전쟁영화입니다. 전쟁영화의 장르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관객들이 기대하는 첫 번째는 거대한 스케일입니다. 아직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퀀스는 전쟁영화의 표본으로 남아있습니다.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 공습 장면은 마이클 베이 특유의 폭발 장면으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케일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고, 전쟁 속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려 합니다. 과감하고 신중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됩니다. 거대한 병력이 부딪히는 광경을 신의 시점으로 감상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을 따라가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감상하게 됩니다. 그가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체험하는 영화는 많았지만 <1917>처럼 주인공의 등 뒤에서 체험하는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알고 쓰는 롱테이크
롱테이크는 현대 영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촬영 기법 중 하나입니다. 촬영 과정은 굉장히 힘들지만 결과물을 본다면 주저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영화에 대부분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영화는 이 영화가 최초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만큼 롱테이크가 적합한 영화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바로바로 떠오르진 않습니다. 이 영화는 롱테이크가 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쓴 영화가 아닙니다. 롱테이크에 대한 대단한 이해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롱테이크는 장단점이 명확한 기법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한 호흡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긴장감이나 공포감이 끊기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됩니다. 가뜩이나 이 영화엔 악역이 없습니다. 등장하는 독일군도 5명 내외입니다. 관객들이 느끼는 서스펜스는 언제 독일군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안 등장하니까, 더 미치는 것입니다. 롱테이크 촬영은 '분명 언젠가 나와야 하는데'라는 이 감정을 집요하게 유지합니다. 주인공들이 평범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관객들로 하여금 '지금 화면 밖에서 누가 주인공을 노리고 있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반면 롱테이크의 단점은 한 호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굉장히 지친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긴장하는 건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은 영화의 연출 지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잔혹한 학살극 속에서 주인공은 공격 중지 명령서를 전달해야 됩니다. 연합군의 참호에서 독일군 참호를 지나 데본셔 연대 2대대에게 전달해야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은 굉장히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촬영에서 느끼는 피로도가 주인공의 감정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는 디카프리오 주연의 <레버넌트>와 유사했습니다. 자신의 원수를 찾아 거대한 자연을 헤매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담았습니다. 고급스러웠습니다.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롱테이크는 인물의 행위만 따라가기 바쁜데
이 영화의 롱테이크는 정확히 약속된 지점이 있었습니다. 연합군 참호와 독일군 참호의 사이의 죽음의 땅을 건너야 하는 주인공들, 이 지점의 롱테이크는 인물을 따라가면서도 정확한 정보를 집어줍니다. 죽어있는 시체들, 썩어가는 말, 그리고 그 위에서 식사를 즐기는 파리들, 이러한 요소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감정이 쌓이게 되는 겁니다.
속도감 있는 시작과 약점
영화에서 주인공이 움직이는 시점이 굉장히 빠릅니다. 보통 영화의 전반부는 많은 정보가 나열됩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영화의 시기와 상황은 어떤지, 영화의 장르성은 무엇인지 등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부분을 엄청나게 축약합니다. 휴식을 취하던 블레이크가 같이 쉬고 있던 스코필드를 데리고 사령부에 가니 바로 임무를 줍니다. 이 부분은 요즘 할리우드에서 유행하는 방식의 시나리오입니다. 설정 단계가 사실 말이 설정이지, 설명을 하는 구간입니다. 영화적 볼거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처음부터 호기심을 유발하고 관객의 흥미를 사로잡고 싶어 하는 작가들에겐 여간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설정 단계는 줄어들고 설정 단계에서 필요한 정보들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열되는 방식을 요즘엔 쓰고 있습니다. <1917>도 그렇습니다. 빠르게 진행되고, 정보를 서서히 흘립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명확한 단점이 있습니다. 잘못하다간 캐릭터가 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사실상 스코필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변화를 겪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여백으로 남기고 관객들에게 넘깁니다. 과감한 도박수였습니다. 어쩌면 감독은 스코필드가 특별한 주인공이 아닌 전쟁 속의 청년들 중 하나이길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의 전환
<1917>은 특별한 작법을 씁니다. 주인공이 전환됩니다. 사실 주인공이 바뀌는 경우는 드라마나 만화와 같이 긴 호흡의 매체에서는 꽤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두 매체에 비해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7>은 굉장히 잘 넘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사건인 '공격 중지 명령서'를 전달받는 건 블레이크입니다. 그가 지도를 잘 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공격을 예정한 부대에는 블레이크의 형이 있습니다. 사건을 가장 능동적이고 간절하게 해결할 인물은 블레이크입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관객들은 주인공을 블레이크로 느끼고, 스코필드는 조력자로 여길 겁니다. 그렇게 세팅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영화의 중반을 넘기기 전에 죽게 됩니다. 관객들에겐 엄청나게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주인공이라 생각했던 인물이 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스코필드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갱도에서 빠져나왔을 때, "왜 나를 데리고 왔냐"라고 투덜거리는 인물을 죽은 친구의 의지를 이어받아 '데본셔 연대 2대대'로 꼭 가야 되는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킵니다. 디테일하게는 엄마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합니다. 스코필드를 더욱더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인물로 만듭니다. 물론 블레이크의 죽는 타이밍이 너무 빨라서 관객의 감정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캐릭터 설명이 초반부에도 거의 없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정보가 나열되기 전에 죽습니다. 이 부분은 궁여지책으로 가족사진을 꺼내게 하고, 엄마 이야기를 하며 단점을 채웁니다. 성공적인 주인공의 전환이었습니다.
악역이 없어도 괜찮아
<1917>은 명확한 악역이 없습니다. <뎅케르크>같이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는 장애물들의 나열입니다. 독일군 참호를 지나야 하고, 무너지는 갱도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부서진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물론 탑에서 만난 독일군과 총격전도 있습니다. 전쟁은 단순히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관련된 모든 공포와 싸우는 것입니다. <1917>은 이렇게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합니다. 재미있는 테마파크 같은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모든 순간이 백미입니다.
영국군의 참호는 스코필드가 이제껏 걸어온 미로와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될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필드는 그 인파를 헤쳐 나갑니다. 그리고 공격의 순간, 스코필드는 참호 안이 아닌 참호 밖으로 뛰어 올라갑니다. 이 부분은 거대한 감동이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한치의 망설임이 없습니다.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자기희생이자, 군인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위대한 발걸음입니다. 이 정도의 완성도를 지닌 전쟁영화는 자주 보기 힘듭니다. 눈과 귀가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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