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제목과 예상 밖의 전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영어 완전 정복>이라는 영화만큼이나 제목이 참 희한해서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들었을지 예상이 가능해 괜히 선입견이 앞섰던 영화입니다. 연출을 맡은 배우 출신 감독인 이종필 감독의 전작이 다름 아닌 수지가 주연했던 <도리화가>라는 것도 탐탁지 않아서 관람을 망설였는데 예고편조차 안 보고 간 덕분에 이 영화는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제 예상을 꽤 많이 빗나가는 재미를 안겼습니다. 그렇다고 기꺼이 추천하고 싶은 정도의 재미는 아니지만 만약 여러분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신다면 명랑한 영화라고 칭찬하실 수도 있는 반면 정색하고 보시면 촌스러운 판타지로 치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성별을 떠나서 많은 분들이 제가 가졌던 선입견처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영화일 거라고 예상하셨을 겁니다. 할리우드고 우리나라고 간에 영화계가 페미니즘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여성 배우 세 명이 전면에 나섰으니 경솔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레짐작해버리기 십상입니다. 더군다나 배경으로 삼은 곳이 페미니즘을 감히 꺼내기도 힘들었을 1995년의 한 대기업인 데다가 이 세명은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잡일만 도맡아 하는 말단 직원입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어떤 영화일지 대번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실제로도 초반부는 주인공 삼인방을 비롯한 고졸 여성 직원들이 모여서 커피를 타고 남성 직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청소와 잔심부름 따위를 하면서도 후배인 대졸 남성 직원에게 진급이 밀리는 등의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는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영락없이 고졸이자 여성이라는 약자의 포지션을 가진 부류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고아성 씨가 연기한 자영이 회사가 운영하는 공장에 갔다가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 뜻밖의 상황인데 자영은 우연히 공장 근처의 냇가에서 다량의 폐수가 흘러 들어가고 있는 걸 목격합니다.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워낙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라 참지 못하고 몇 번을 고민한 끝에 같이 갔던 대리를 통해 상사에게 보고하는 걸 기점으로 이 영화는 이를 테면 <에린 브로코비치>와 <히든 피겨스>가 결합한 형태로 돌변합니다. 다시 말해 제가 참으로 섣부르게 넘겨짚었던 것과는 다르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제 각기 다른 성격의 여성 세 명이 의기투합해 저마다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환경파괴를 일삼고 있는 회사의 비리를 파헤쳐 만천하에 공개하려고 동분서주한다는 게 본론인 영화입니다.
캐릭터의 개성과 디테일
이렇게 말씀드리면 욕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시라도 제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영화였다면 거부감이 컸을지도 모릅니다. 다른걸 다 떠나서 툭하면 노골적으로 페미니즘을 빙자한 어설프고 엉성한 졸작이 나오니 개인적으로는 편견이 생길 만도 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데 다행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약간 우회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물론 여전히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다는 건 변함없으나 당연하게도 소재 자체에 대한 반감은 없거니와 적어도 이 영화는 단순히 페미니즘에 기댄 채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뻔뻔한 짓은 안 합니다. 대신에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의 간절한 마음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자에게 필요한 용기를 차례대로 이어 약자들의 연대를 보여줍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그렇게 페미니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폭넓고 보편적인 주제를 시종일관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전달하면서 관객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건 각 캐릭터의 개성과 더불어 디테일에 은근히 강하다는 겁니다.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들이 성격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다는 걸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각인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사건이 전개될수록 바로 그 성격과 성향의 차이가 빛을 발하고 헌데 어우러지며 흔히 하는 말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면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수월하게 풀어갑니다. 심지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개별적으로 겪었던 사연이랑 슬며시 흘리고 지나가는 대사마저 사건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열쇠로 작용하면서 개연성과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덕분에 비록 스케일은 아주 크지 않으나 이리저리 연관된 인물들이 많아서 자칫 지난해질 수 있었던 과정을 빠르게 정리하는 순발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세 명의 배우가 단지 간판에서 그치지 않고 진정한 협업을 이뤄내며 각 캐릭터의 분량, 비중, 역할을 탁월하게 조율합니다. 그게 곧 관객들에게 지켜보는 재미를 더해줬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색하고 봤을 때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렇게 좋은 얘기로 치장했으면서도 여러분이 너그럽게 보시면 명랑한 영화지만 정색하고 보시면 촌스러운 판타지라는 말로 판을 깔았던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좀 전에 실타래를 수월하게 푼다는 둥 순발력을 발휘한다는 둥 한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렇다는 거고 저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실 수도 있을 분들에게는 무성의하게 보일 여지가 다분합니다. 솔직히 그럴 만도 한 게 각본에서 사건을 나름 치밀하게 잘 구성했으면서도 연출은 짧은 시간 내에 톤과 템포를 유지하면서 풀어내야 하다 보니 몇 군데에 걸친 난관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결해 버리고 지나가서 긴장이랄 게 없다 못해 맥이 풀리기 일쑤인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반전이 이어지면서 여러 번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는 후반부는 압축이 아니라 숫제 생략에 생략을 거듭하는 지경으로 보일 만큼 편집의 흐름이 뚝뚝 끊어지는 데다가 낙폭이 굉장히 커서 이전까지 봤던 이야기들을 죄다 서론으로 취급해도 될 수준이라 막말로 마지막 30분만 봐도 될 영화라는 평이 나와도 이상하진 않을 정도입니다. 설상가상 결말은 저 조차도 감싸줄 수 없을 만큼 유치한 대사와 연출로 수를 놓다가 널리고 널린 동화처럼 'Happily Ever After'로 막을 내리는 게 아무래도 다양한 소재가 지닌 무게감에 비해 마냥 가벼워 보여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한낱 졸작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은 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자신만의 장점이 뚜렷해 어떤 영화를 원하느냐에 따라 엇갈린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상업 영화라면 적당한 메시지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야 하니 이종필 감독이 선택한 지금과 같은 연출이 아주 나쁘진 않은 판단이었다는 결과를 부를 거 같지만 한편으로는 배우들의 연기와 호흡도 좋았던 마당에 조금 더 차분하고 진중한 영화로 완성되지 못한 게 유감으로 남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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