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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라걸, 실화가 주는 거대한 감동

라라걸

제가 생각하는 <라라걸>은 많이 부족한 영화입니다. 디테일한 곳에서 너무 많은 점을 놓쳤습니다. 그럼에도 <라라걸>은 명확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실화가 주는 거대한 감동입니다. 성의 경계를 뛰어넘은 이 위대한 이야기는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레이첼 그리피스 감독의 <라라걸>입니다.

각본 있는 드라마

경마를 잘 모르는 저로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155년간 금녀의 구역이었던 멜버른컵을 미셸 페인이란 한 여성 선수가 탈환한 것입니다. 만약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작위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스포츠에서 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건 너무나도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입니다. 문제는 영화에서는 각본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여성의 일대기를 98분이란 시간에 적절히 녹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선택과 집중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지만, 이 영화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너무 영화 같은 실화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포기하기가 힘듭니다. 여성 기수에 대한 세상의 편견, 가족 간의 갈등, 멜버른컵으로 가기 위한 여정,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 등등 감독으로서 포기하기 힘든 이야기인 건 사실입니다. 하나같이 극적이고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넣기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시간이 너무 빠듯합니다. 부족한 시간은 부족한 묘사를 불러오고 모든 갈등을 쉽게 엮거나 쉽게 풀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지점은 넓게 보면 긴장감을 약화시킵니다. 경마 이야기에 관한 묘사는 더욱 부족합니다. 첫 번째 경기에선 꼴찌를 하다가 다음 경기엔 내레이션과 함께 갑자기 1등을 합니다. 여성이란 이유로 말을 못 타게 하자 주인공은 훈련시킨다는 이유로 그냥 몰래 타버립니다. 멜버른컵을 앞둔 상황엔 더욱더 심각합니다. 모든 갈등이 말 한 번으로 다 해결됩니다. 명마 '프린스'를 얻는 과정도 말 한 번, 징계를 해결하는 방법도 말 한 번, 트레이너와의 갈등도 아니나 다를까 말 한 번으로 해결됩니다. 스포츠 영화의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매력이 부족한 영화입니다. 여성 영화의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매번 봐왔던 기성품 수준입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친 격입니다. 차라리 볼륨감이 있는 드라마로 제작됐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았습니다.

실화가 주는 감동

이 영화의 엔딩이 주는 감동은 분명 존재합니다. 사실 치트키입니다. 앞부분을 안 보고 엔딩만 봐도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많은 남성 기수들 사이의 홀로 선 여성 기수, "오늘 끝나고 뭐 하냐"는 남성의 농담에 "축하하려고요"라는 여유로운 대답을 합니다. 이 부분의 대사가 좋았습니다. 그녀의 자신감과 그간의 노력을 관통하는 멋진 대사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경마 신이 그나마 괜찮았습니다. 이전 경마 신은 정말 리듬감이 없었습니다. 그냥 타이트한 샷들이 나열되고 달리다 보니 1등이더라 식이었는데 마지막 시퀀스는 어느 정도의 리듬감을 회복했습니다. 뒤처져있는 상황에서도 수십 번 연습해왔던 인내를 발휘하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두의 성원이 그녀에게 닿을 때쯤 결승점을 향해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시감이 강하지만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럼에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건 앞부분의 쌓아둔 설정과 이것이 실화이기 때문이고 영화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입니다.

 

기술적 완성도

영화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기술들이 평균 이하입니다. 온전히 영화를 보는 것을 방해할 정도입니다. 상상력, 창조성과 같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입니다. 일단 컷과 컷의 연결에서 이질감이 너무 듭니다. 대표적으로 이미지 라인을 넘거나 비슷한 컷 사이즈를 연결했을 때 발생하는데 이것이 어떠한 연출 의도 없이 심지어 숨길 의지도 없이 사용됩니다. 그 외 촬영도 옛날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경마도 일종의 시간을 다투는 레이싱 영화인데 속도를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거리를 조절해 순간적인 속도감을 얻을 수도 있고, 풀샷으로 인물들 간의 거리를 보여줘 그들의 공간감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스테디캠으로 인물의 측면이나 후방만 따라갑니다. 말과 기수를 그저 전시하기 바쁩니다. 말이라는 생물이 달릴 때 동작이 매우 크고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말발굽에서 나는 소리는 레이싱 영화에서 보기 드문 아주 묵직한 느낌을 전달합니다. 최상의 재료인데 다루는 방법이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