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온 배트맨 영화와는 다른 이야기
수십 년간 이어진 히어로 무비 전쟁에서 마블이 승리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DC 팬들이 자부심을 느꼈던 건 바로 작품성은 DC다. 예술성은 아무래도 DC가 앞서있다였습니다. 평단에게 최고의 히어로 무비로 뽑히는 '다크 나이트'와 코믹스 원작 영화 최초의 베니스영화제 황금 사자 상을 수상한 '조커'까지 이들이 바로 DC 배트맨 시리즈의 혈육입니다. 하지만 승자의 욕심엔 한계가 없어 보입니다. 마블 또한 최고의 작품성을 만들기 위해 아카데미 출신 감독인 클로이 자오를 섭외하고 영화의 방향성을 좀 더 세기의 화두에 맞추며 마지막 남은 DC의 고지를 넘보려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마블의 자충수도 있었지만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통해 다시 한번 작품의 방향을 재정비했고 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꿨습니다. 마블과 DC의 히어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제2차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선봉엔 역시나 DC의 정신적 지주인 배트맨이 '더 배트맨'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다시 한번 관객을 공략하려고 합니다. 우선 '더 배트맨'은 '조커'와 같이 DC 필름스에서 제작했지만 DC 유니버스에 속하지 않는 완전한 독립된 작품입니다. 억지로 유니버스 세계관에 끼어 맞출 필요도 없고 후속작이나 전작을 위해 본작을 희생할 필요가 없는 작품입니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독보적이고 한 편으로는 굉장히 이질감이 드는 작품입니다. 영화 개봉 전 북미 언론시사회에서 말한 감상평이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나온 배트맨 영화와는 다르고 놀라울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운 누아르 영화다" 이 평가가 영화를 한 줄로 설명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문장이 '더 배트맨'은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르다'와 '누아르'라는 점이 호불호를 부를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더 배트맨'은 히어로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전통 누아르의 스타일과 형식을 가진 영화입니다. 쏟아지는 비와 외로운 주인공 그리고 그를 감싸는 묵직한 어둠은 전형적인 누아르의 스타일이며 도시의 고위 관료들을 죽인 살인자를 쫓는다는 설정은 누아르의 원류인 탐정소설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두운 범죄 추리물이라는 말입니다. 영화의 액션 또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목적이 아닌 이야기를 풀어가는 수단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써야 할 때만 최소한으로 등장하고 전시적으로 나열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과 빌런 사이의 갈등이 영화의 핵심 장르이며 그 갈등을 액션으로 푸는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영화입니다. 또한 요즘 히어로 영화는 히어로뿐이 아니라 강력하고 매력적인 빌런도 중요합니다. 심지어 오프닝 시퀀스를 빌런에게 내주는 경우도 이제는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빌런이 전면으로 드러나지도 강력한 매력을 내뿜지도 않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환경이 못 됩니다. 앞서 말했듯 범죄 추리물에 가까운 영화입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의 빌런은 추리의 대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철저히 감춰져 있고 풀려가는 실타래의 마지막 도착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메인 빌런 말고도 여럿의 악역이 나오지만 그들 또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하나의 퍼즐 조각입니다. 이렇듯 기존의 히어로 영화와는 많은 부분이 다른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예상이 아닌 기대를 벗어난 것으로 느끼신다면 다르다는 것은 '더 배트맨'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 다름이 틀림이 아닌 새로움으로 다가오셨다면 '더 배트맨'은 또 하나의 가치를 가진 작품이 될 겁니다. 앞서 말한 다름의 요소를 뒤집어 본다면 배트맨에 가장 어울리는 어두움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브루스 웨인의 분위기와도 굉장히 잘 어울립니다. 연출적으로도 암흑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순간적인 서스펜스나 서프라이즈를 효과적으로 발생시킵니다. 최소한으로 등장하는 액션은 오히려 반복이 없기에 굉장히 밀도 높습니다. 특유의 묵직함과 둔탁함이 잘 느껴지고 이러한 젊은 배트맨의 정제되지 않은 야수성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배트카 또한 굉음의 배기음과 함께 등장하며 팬들을 들뜨게 합니다. 빌런이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오롯이 그 시간을 주인공에게 투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초창기 부루스 웨인과 배트맨을 조명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가면 쓴 자경단과 히어로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때로는 복수와 정의가 일치하고 때로는 복수와 정의가 갈라지는 그 사이에서 배트맨은 어떠한 선택을 하고 어떠한 성장을 거치는가가 이 영화의 핵심 재미이자 메시지입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와 완벽하지 않은 풀이
영화가 지루하진 않지만 사족이 있는 느낌으로 조금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크 나이트'는 많은 인물과 사건이 있는 복잡한 이야기임에도 때론 과감히 생략하고 때론 설명 보단 캐릭터성으로 밀어붙이며 간결하게 풀어갑니다. 반면 '더 배트맨'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엮여 잇는데 그걸 간결하게 풀어가지는 못합니다. 이야기를 엮는 시간에 비해 푸는 시간은 부족하고 그 풀어가는 과정을 대부분 대사로 해결합니다. 중요한 대사를 놓치거나 집중도가 떨어지면 몇몇 지점은 감에 의해 이야기를 유추해야 합니다. 또한 캣우먼과 몇몇 서브플롯과 악역 몇 명은 과감히 쳐내도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영화의 감정의 폭이 단조로운 감이 있습니다. 사실 배트맨의 최종 성장을 의도적으로 평이하게 연출합니다. 애초에 극의 분위기에 맞게 큰 파도를 만들기보다는 잔잔한 강에 작은 돌을 던지는 느낌입니다. 그러다 보니 극의 리듬감을 만들기 위해 영화의 중간쯤 거대한 감정의 변환점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게 효과적으로 작용하지는 못합니다. 브루스 웨인이 가진 내적인 결함이나 연민이 설정 단계에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가 고아를 보는 시선이나 알프레드와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지만 중반부에 이 휘몰아치는 감정을 만들기엔 좀 부실하다고 생각됩니다.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지만 그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이나 생각은 한 번쯤 명확하게 집어줄 필요는 있어 보였습니다.
새로운 도전과 개성을 만든 영화
배트맨이 다른 DC의 히어로보다 특유의 능력은 약하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는 점이 매력인데 그 인간이라는 불안정함을 로버트 패틴슨이 잘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폴 다노는 적은 분량임에도 굉장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달합니다. 몇몇 영화의 악역에서 조커를 잘못 따라 해 위험한 사람보다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칠 때가 있는데 폴 다노는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 정확히 알고 연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더 배트맨'은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기존의 안전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과 개성을 만들었다는 점에 큰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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