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도망자의 후폭풍
미국의 개입으로 이란의 왕이 된 팔라비 2세, 그는 폭정을 일삼은 독재자였고, 국민들의 분노로부터 미국으로 몸을 숨긴 비열한 도망자였습니다. 이란의 시위대는 이 사태의 원흉인 미국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사관 앞에 모여 팔라비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대사관 내부는 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력에 눈이 먼 군중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피신이 가능한 6명의 직원들은 본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몸을 숨기기로 합니다. 이 사건은 연일 뉴스에 오르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로잡힌 60명가량의 인질들은 세계의 이목 덕분에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었습니다. 문제는 '6명의 도망자'였습니다. 시위대가 그들을 발견한다면 '스파이여서 도망쳤다'와 같은 구실로 그들을 처형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수뇌부는 이 골치 아픈 상황이 며칠 뒤면 잠잠해질 거라 믿고 그저 폭풍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69일이 지났지만 시간은 이란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명확한 광기를 더했을 뿐입니다. 이제 그들은 인질들 중에 스파이가 숨어있다 믿고 재판하기 시작했으며 파쇄된 서류들을 복원해가며 미국의 꼬리를 잡으려 했습니다. 미국은 더 이상 '6명의 도망자'들을 방관할 수 없었고, 그들을 구출해 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묘수는 없어 보입니다. 식물학자 작전, 자전거 작전, 선생님 위장 작전 CIA 구출 전문가 멘데스 요원이 보기에 너무 허술해 보였습니다. 진전이 없던 하루 끝에 멘데스 요원은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별거 중인 아내에게 한소리 듣고 통화를 마치게 된 멘데스 요원, 지금 그의 눈앞엔 혹성 탈출이, 사막이, 이란의 풍경이 비쳐옵니다.
담백한 구성
다소 무게감 있게 진행된 이야기는 멘데스 요원의 번뜩임과 함께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합니다. 영화의 장르가 바뀐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와 연출, 템포에서의 큰 변화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아르고'라는 제목의 거짓 영화를 준비하는 이 평화로움은 간혹 비치는 6명의 도망자들의 불안과 섞여 불협화음을 이뤄냈습니다. 우리는 조만간 폭풍이 들이닥칠 것을 알기에 이 평화 속에서 유쾌함이 아닌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구조로 말입니다. 가짜 영화는 단지 잠입을 위한, 탈출을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폭풍전야의 고요 같았던 일명 '할리우드 씬'은 일체의 낭비 없이 진행되었고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멘데스와 6명의 만남과 함께 폭풍을 맞이하게 됩니다. 멘데스 요원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단 한 번의 총격전도, 그 흔한 자동차 추격전도 벌이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미국 CIA 영화'에서 흔히 볼 법한 액션신들은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폭풍의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바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촛불을 지키듯 결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연출을 통해, 긴박한 사운드를 통해, 불안에 휩싸인 인물 묘사를 통해 계속해서 이들을, 또 우리들을 휘몰아쳐왔습니다. 첩보영화들이 그려왔던 화려함은 없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르고라는 작품을 스릴러 영화로 바라본다면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긴장감을 거대한 폭풍을 불어올 것을 확신합니다. 너무나 담백하였기에 오히려 신선한 영화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색다른 팽팽함을 여러분들에게 아르고를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오묘한 조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엔 결코 과장된 요소들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순 명료한 조건과 이를 헤쳐나가는 콤팩트한 연출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콤팩트함에, 담백함에 극적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도망자들이 헤쳐나가야 할 조건'이란 것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인간이 최악의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가감 없이 묘사했고, 이 먹먹함 속에 놓인 인물들의 심리도 입체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정확함 외에도 막연함을 가미하여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구성에 조미료를 더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망자들이 머물던 고스이 가사도우미, 일말의 힌트조차 없었던 그녀의 성향이, 또 도망자들을 향한 의심이 그 조미료 중 하나일 겁니다. 직관적인 '조건'은 무력함을, 막연한 '변수'는 불안감을, 이 상황 속에 인물들의 감정선은 몰입감을 제공하였습니다. 정확히 언제 빠져들게 되어 도망자들의 신변을 걱정하고 응원하게 된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담백하기도 하고 톡 쏘기도 하는 영화의 장치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뤄 빼어난 몰입감과 작품성을 부여한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실화와 영화 본연의 가치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수많은 평론가들 그리고 관객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의 진위 여부와 구현도를 궁금해합니다. 냉철하게 얘기하자면 캐나다의 공으로 성공했던 이 작전은 감독이자 배우인 벤 에플렉이 연기한 멘데스 요원의 공으로 돌아갔고,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시장 신, 공항 신은 오로지 작품의 '재미'만을 위해 추가된 영화만을 위한 장면이었을 뿐입니다. 영화를 위한 각색들이 전부 빠지면, 제가 앞서 언급했던 장점들이 거의 다 사라지게 될 겁니다. 즉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본연의 가치는 영화만을 위한 요소들에 있다' 조심스레 주장하고 싶습니다. 마치 첩보영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첩보영화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역사를 왜곡하여 은연중에 '미국 만세'를 외치는 작품도 아닙니다. 초반 1분만 살펴봐도 그들은 분명히 미국의 치부를 드러냈고 이란 시위대에게는 타당성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선별할 여지를 남겨주고 선동하려 하진 않았습니다. "최고의 첩보영화냐, 최고의 스릴러냐"라고 물으신다면 아니오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실화를 참고하여 '있을 법한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고 팽팽하게 표현한 색다르고 든든한 스릴러 영화로 답하기도 하겠습니다. 불안함과 해방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이 영화 '아르고'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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